[오늘의 교육]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일 수 없다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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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는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모두가 의심 없이, 교육의 긍정적인 역할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 말은 세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한다. 첫 번째, 이 말의 전제는 계층 간 불평등이 계속 존속하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면 누군가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데, 그 기준은 무엇인가? 세 번째, 궁극적으로 교육의 목적이 계층의 상승인가? 이 의문점들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담론의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로망의 유래


한국에서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은 ‘교육 출세론’과 ‘개천에서 용 난다’로 널리 통용되어 왔다. 교육 출세론이 학력과 학벌이 계층 상승의 도구라고 확신하는 것이라면,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은 교육이 ‘개천’과 같은 빈곤한 환경 혹은 가정의 자녀도 출세한 인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교육이 계층 사다리로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이제는 70년이 다 된 6.25 전쟁 이후, 단기간에 극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압축적인 성장을 한 한국의 특수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믿음이다. 조선의 멸망과 일제 식민 지배로 갑작스럽게 근대를 맞이하면서 전통적인 신분 제도는 무력해졌다. 이후 전쟁으로 경제 구조가 초토화되면서 유례없이 비슷한 조건에서 계층 상승을 위한 경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만큼 빈곤이 전 사회적이었다는 사정이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도 소수였거니와, 도시에서 웬만한 직업을 가지면 출세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비교적 ‘용’으로 대접받기도 수월했다.


또한 교육을 통한 출세는 가족주의적인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자녀가 출세하면 한 가정의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도록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전략은 한국의 가정이 빈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사회적인 ‘계층 상승 로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전히 그 ‘로망’이 사회적 신념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통로로서 교육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사회 대부분 영역이 ‘개천’이었던 시절,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용’으로 여겨졌던 직업은 공직이었다. 조선 시대에 관직을 가장 좋은 직업으로 여기던 데서 이어진 인식이었고, 이 시절에는 학력과 학벌이 공직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교육열이 치솟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철수하면서 신생 독립 국가가 된 한국에서, 공직의 하위직부터 고위직까지가 모두 한국인으로 채워지면서 공직의 수도 급격하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 학교교육의 출세 효과는 전 사회적으로 가시적인 것이었다. 1960년대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이 시작되자 무역과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출세직 또한 빠른 속도로 다양해지고 수가 늘어났다. 좋은 일자리가 빠르게 늘어날수록 표준 자격으로서 교육 수준이 중요해지면서 교육 출세론은 사회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졌으며, 교육열 또한 나날이 드세졌다.


나는 30대이고, 나의 부모 세대도 교육으로 인한 출세 효과가 가시적인 사회에서 성장했으며,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거나 기회를 놓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인즉 현재 20~30대 세대까지도 교육 출세론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층 상승은 시대를 막론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달콤한 동력인가. 교육으로 인한 성취로 계층이 상승할 수 있다는 믿음은 대학 진학률이 70%를 웃도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은 한국의 근대 서사에서 우리에게 잊히거나, 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한국 경제를 그렇게 성장시켜 온 수많은 일자리들 및 그와 연결된 교육과정들은 무엇으로 대체되고,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실업계 학교는 어떻게 낙인으로 전락했나


나는 2016년부터 공업 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를 심층 면담하여 능력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학력 낙인이 재생산되는지를 연구해 왔다. 공업 고등학교의 사례는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준다.


교육 출세론과 함께 경제 성장 시기에 주목받았던 교육 담론은 교육이 적극적으로 인력을 창출해 내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발전 교육론’이었다. 공업 고등학교는 전형적인 발전 교육론에 입각해 설립된 교육 기관이다. 실업계 학교는 일반계 학교와 함께 중등교육 체제를 구축하며 고등학교 팽창에 기여해 왔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1910~1920년대에 실업교육과 인문교육으로 이원화된 중등교육 체제를 확립했다. 교육 기관을 이원화했던 이유에는 실업교육이 국가의 경제 발전과 정치적 안정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발전 교육론에 입각한 믿음이 있었다. 이는 실업교육은 국가의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자에게 적합한 교육을 제공하고, 노동자 계층의 자녀들을 교육 제도 안으로 포섭하여 사회를 통합시키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1920~194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1950년 이후에는 신생 독립국들이 중등교육 단계에 실업교육을 도입하였다.


한국의 경우 실업교육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도입되었다. 당시 실업 학교는 중등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농업, 상업, 공업, 수산 학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 기간 동안 중등교육과정 전체에서 농업 학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농업 노동을 강화하여 식민지 지주제를 유지하고, 반(反)지식교육을 통해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실업교육에는 초기부터 국가의 의도가 강하게 관철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업교육은 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어 경공업에 필요한 기능 인력 양성이 중요해지면서 1960~1970년대에 부흥기를 맞았다. 이 시절 실업계 고등학교가 집중적으로 확충되면서 1969년에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전체 고등학교의 52%를 차지했고, 재학생 수는 전체의 45%를 차지했다. 특히 공업 고등학교는 1970년대 중화학 공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공업 고등학교가 이 분야의 인력을 확충하는 역할을 맡아 학생 수가 대폭 늘었다.


2006년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실업계 고등학교의 “실업”명칭 변경 공청회〉 자료에는 “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명칭이 주는 ‘낙인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실업계’라는 고등학교 분류 명칭을 변경하여, 학생 및 학부모에게 매력적인 학교 이미지로 개선될 수 있게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1970년대까지 잘나가던 공업 고등학교는 어떤 이유로 쇠퇴를 넘어 ‘낙인’의 길목에까지 놓이게 된 것일까. 1970년대까지 중공업의 부흥과 함께 공업 고등학교에는 각종 혜택을 포함하여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그러던 중 1980년대 국가의 주력 산업이 중공업에서 첨단 산업으로 이행하면서, 산업의 중심 인력도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 수준을 갖춘 기술 인력과 연구 인력으로 이동하였고, 국가의 교육 정책의 중심도 대학으로 이동하였다.


1980년대 대학 입학 정원 확대 정책까지 실시되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실업계 교육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정부가 교사, 교지, 교원, 수익용 기본 재산의 네 가지 최소 요건만 갖추면 비수도권 지역에 누구나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대학 설립 준칙주의’를 시행했다. 2013년 대학 설립 준칙주의가 폐지될 때까지 한국에 63개 이상의 대학이 신설됐다. 대학 공급의 폭발적인 증대였다. 1980년대 이전에 15%에 미치지 못했던 대학 진학률은 1990년대 급증하면서 2000년대에는 무려 80% 수준까지 상승했다. 2022년 현재 대학 진학률은 70% 수준이다. 한국에서 이제 대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질 만큼 정상성의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김현경은 한국을 “대학을 나와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 사회”라고 일갈했다. 공업 고등학교가 국가 산업에 이바지하며 맹위를 떨치던 때로부터 약 30년 만의 일이다. 한때 계층 이동의 희망이었던 교육 기관이 이제는 낙인을 재생산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능력’이라는 것이 시대적 맥락에 따라 섬뜩하리만치 가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업 고등학교의 쇠락이 우리에게 남겨 준 교훈은 기민하게 시대를 읽어 내는 것 또한 ‘능력’이라는 새로운 능력주의도, 결국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시대를 타고나야 한다는 푸념이나 단념도 아니다. 능력은 결국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육은 불평등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법무부 장관(후보자로 지명된) 한동훈의 고등학생 자녀가 입시 스펙을 쌓기 위해 1년간 수차례 대필 논문을 게재하고 전자책을 출판하는 등 거짓 경력을 쌓은 것이 논란이 되었다. 상류층의 이러한 부정 입시 비리 스캔들은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서론에는 2019년 미국에서 33명의 상류층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퍼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 등의 명문대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입시 부정을 저지른 이야기가 나온다. 입시 표준 시험 감독관들에게 돈을 찔러 줘서 해당 학생들의 답안지를 조작하고, 운동부 감독들에게도 돈을 써서 운동 경력이 없는 학생이 운동 특기생 자격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정황 등이다. 다시 한동훈 후보자의 사례로 가 보자. 한동훈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의 대표직을 지냈으며, 그의 아내는 한동훈과 서울대 법대 시절에 만났고 현재 미국 김앤장 로펌의 변호사이다. 대대로 최상류층의 삶을 살아온 한동훈의 가족은 무엇이 불안해서 이처럼 부정을 저지를 만큼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일까. 여전히 계층을 사수하고, 자녀에게 계층을 대물림해 주는 데 학력과 학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학력과 학벌은 강력한 상징 자본이다.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는 학력 혹은 학벌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지표로서 정당하다는 사회적 믿음 체계이다. 이러한 믿음 체계가 학력·학벌주의 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을 기준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화가 배분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게 만들어 준다. 나아가 학력과 학벌이 계층 이동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학력주의와 학벌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강력한 축이다. 이 같은 믿음은 학력과 학벌이야말로 개인의 순수한 노력으로 성취한, 그러니까 가족으로부터 세습될 수 없는 계층과 분리된 능력이라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회과학 연구는 그와 정반대의 증거를 보여 준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는, 한국보다 일찍 근대화로 인한 산업 사회가 시작된 유럽에서는 학력과 학벌이 계급을 세습하는 사회가 붕괴된 시점부터 기득권이 자신의 계급을 수호하기 위해 새로 쌓기 시작한 성이었다는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기득권 계층이 학력과 학벌을 자신들의 성으로 쌓는 방법은 경제 자본을 학력 자본으로 빠르게 전환시킴으로써 학교를 통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학력과 학벌을 취득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력 자격의 가치도 점점 하락하게 되었다.


학력 자격의 가치가 하락하면 학력에 의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력 자격의 가치 하락의 가장 큰 희생자는 학력 자격 없이 노동 시장에 들어왔던 사람들이다. 학력 자격의 가치가 하락하면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완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무학력자들에게도 개방되어 왔던 직위들이 이제 학력 자격 소지자들에 의해 채워지면서 오히려 저학력자들의 취직 통로가 극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학력 자격의 과잉 생산과 그로 인한 학력의 가치 하락은 상류층에게도 위기이다. 과거에 경제 자본을 가진 일부 계층이 부여받기 유리했던 학력 자격의 가치 하락은 계층 세습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육의 신자유주의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교육의 신자유주의화는 교육을 시장이자 상품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교육 소비자로 바라보는 관점에 근거한다.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의 특징은 교육에 자유 시장 질서를 도입하여 교육을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시장 거래로 만들어 자본주의적인 경쟁을 제한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시장주의 교육은 1995년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 개혁 이후부터 국가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장주의 교육은 ‘다양성’과 ‘자율’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학부모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명목 아래 도입되었다. 고교 평준화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해 학생들의 능력 하향 평준화를 가져온다는 주장도 공교육의 시장화를 정당화했다.


1992년 외국어 고등학교가 특수 목적 고등학교로 지정되는 것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국제 고등학교가 도입되었으며, 2002년부터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가 지정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공교육의 신자유주의화였다.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 100개, 기숙형 공립 고등학교 150개, 마이스터 고등학교 50개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자연스럽게 이는 가구 소득에 따른 공교육의 서열화로 이어졌다. 2009년 당시 통계에도 외고 학생의 44.7%가 소위 상위 직업으로 여겨지는 판검사, 의사, 교수, 기업 경영진의 자녀들이었고 이는 일반 고등학교의 3.5배에 달하는 결과였다.


공업 고등학교의 산학 협력을 강화하는 〈고등학교 직업교육 선진화 방안〉도 이때 함께 시행됐다. 이때부터 공업 고등학교를 포함한 특성화 고등학교들은 살벌한 취업률 압박에 놓이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말한 ‘선진화’란 특성화 고등학교에 취업률을 높이도록 압박하여, 이들의 대학 진학 가능성을 낮추는 것을 뜻했다. 동시에 이명박 정부는 2008년, 2006년에 제정되었던 직업계 고등학교의 〈현장 실습 정상화 방안〉도 폐기하며 현장 실습생의 안전망을 걷어차고 중등 직업 교육과정을 철저하게 시장의 수요에 맞추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2011년 25%였던 목표 취업률은 2013년까지 60%로 제시되었고, 취업률에 따라 학교 지원금을 차별화하고 목표치 미달 학교를 통폐합할 계획을 발표하며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을 낮추기 위해 학교에 전방위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해마다 현장 실습 도중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들이 산재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한편, 매 정권마다 고위 공무원들의 입시 비리로 국가가 들썩이는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면서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진다.


개인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학업 성취도 이전에 ‘진학 가능성’이다. 대학교육 무상화가 이뤄지지 않은 한국에서 진학 가능성의 선행 조건은 말 그대로 등록금을 내면서 학업 기간 동안 노동을 유예할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산의 유무이다. 앞서 말했듯이 상류층 자녀들이 비평준화된 중등 교육과정에서 자본을 통해 실력을 갖추고 특별한 상위권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직업계 고등학교 입학 역시 철저하게 계층의 동학이 개입한다. 


사람들은 대개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순히 공부를 못하거나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공업 고등학교에 왔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거기에는 성적이 순수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편협한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 재차 강조해도 무색할 만큼 어느 시대에나 공부는 구매력과 여유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공교육 제도가 시작된 이후 공부를 순수한 노력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팽배하지만, 높은 학벌과 학력은 공교육만으로는 불가능한 성취이며, 대학 입시만을 유일한 성취의 준거점으로 삼는 공교육 안에서는 영원히 계층 불평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중등교육 제도 이후에도 대학은 학비를 지불할 능력 없이는 절대 진학할 수 없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선생과 부모만큼이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연구를 진행하는 내내 만난 대부분의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학을 학비로 치환하여, 자신 혹은 부모에게 대학 등록금을 지불할 능력도, 대학을 다닐 시간 동안 노동을 하지 않을 여유도 없음을 토로했다. 교육이 자본에 따라 계층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교육은 오히려 계층 간의 격차를 점점 넓힐 뿐이다.


대학 입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충분한 자산 없이는 대학 생활을 견딜 수 없다. 천주희는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2016)를 통해 대학이 어떻게 부채를 권하는지 입체적으로 기술해 낸 바 있다. 천주희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대학 생활 4년 + 1년’에 필요한 최소 자본은 1억 1330만 원이다. 그러니까 이 이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만일 이 돈이 없음에도 대학에 입학한다면 부채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천주희는 자신의 중학생 시절을 되돌아보며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내 줄 형편이 안 되는 친구가 교사로부터 상업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받았던 일화를 말한다. 대학에 진학한 저자가 가진 자본은 1000만 원이 전부였고, 그때부터 저자는 학자금 대출과 대출 상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1억 1330만 원의 최소 자본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대학 졸업은 곧 부채 상환 압박의 시작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대학 진학률 70%가 넘는 사회,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본 없이는 대학을 졸업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대학만 두고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앞서 말했듯 신자유주의 시장이 되어 버린 공교육의 현실에서 학력과 학벌을 위해 필요한 돈은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니다. 사립 중· 고등학교 학비와 막대한 사교육비까지 더해져야 학력과 학벌을 쟁취할 수 있다(그나마 고등학교 과정은 얼마 전에야 무상화되었다).


게다가 지방대 차별은 얼마나 심각한가. 대학 졸업이 일반화된 반면 일자리는 현저히 줄어든 고용 시장에서 대졸자라는 학력 프리미엄을 뚜렷하게 누리는 집단은 상위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통계적으로는 미지수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고용 시장에서 당장 학력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은 이미 낙인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사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대학 졸업장을 따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졸업 후에 위치하게 될 계층은 대학 입학 전 자산 불평등과 비례하곤 한다. 교육이 경제적 불평등의 악순환을 빚는 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다리는 필요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여야 한다는 명제의 전제는 계층 불평등이 존속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층 불평등은 결국 교육 결과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한국의 교육이 계층 불평등의 원인과 결과의 순환 고리 역할이라는 한계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계층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교육이 구매의 대상인 이상 계층 이동은 영원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교육하든 간에 교육의 전제는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지향해야만 사람들이 계층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나아가 교육은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하다. 따라서 나는 강력하게 교육의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가는 ‘지불하는 교육’ 프레임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지불하는 교육’ 프레임이란 교육받는 이가 교육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이 계층 상승을 위한 일종의 투자라는 생각도 포함한다. 교육은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시민으로서 당연히 구매하지 않고도 원하는 만큼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하지 않아도 학습할 수 있는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


신자유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교육이 계층 이동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 때가 있다. 그런 전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경쟁의 구호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올라갈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경쟁하는 교육과 그 경쟁에 의한 결과가 공정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교육이 만들어 내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작용을 한다. 계층 이동은 개인의 몫이어서는 안 된다. 계층 간 격차를 적극적으로 줄이는 것은 이 사회의 몫이어야 한다. 교육은 개인이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앞다투는 과정이어서는 안 되며,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과정이어야 한다. 경쟁은 교육의 내용과 평가 기준을 획일적으로 만듦으로써 사회가 다양한 교육을 고민하지 못하게 하고, 평등한 사회를 상상하지 못하게 막을 뿐이다.


《능력주의와 불평등》에서 채효정은 학벌 사회보다 자본 사회가 막강해졌다고 판단하고 이를 자조하며 해산한 ‘학벌없는사회’가 자본의 강화로 인해 노동의 가치가 약화되는 시기에 도리어 학벌 경쟁을 격화하는 능력주의의 고리를 놓쳤다고 되짚으며 이렇게 말한다. “지배자에게 두려운 것은 사다리를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평평해지려는 사람들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결국 사다리 위에 있는 계층의 방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모든 시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의 권리가 지켜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사다리가 필요 없는 평등한 사회이다. 한국 사회에 정말 필요한 논의는 교육에 수반되는 기본적인 경제권의 평등한 보장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논의할 가치가 있는 진정한 ‘공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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