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 대학거부, 선언의 정치 - 재생산을 넘기 위한 저항의 연대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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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s://communebut.com/Article/?idx=13764483&bmode=view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학교와 계급 재생산


누군가 나에게 학교를 연구하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을 묻는다면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꼽을 것이다. 이 책의 첫인상은 계급을 재생산하는 반학교 문화에 대한 씁쓸한 우화였다. 이 책은 노동자 계급 아이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노동자 계급을 받아들이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반학교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폴 윌리스는 반학교 문화의 가장 기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은 ‘권위’에 대해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집요하게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자 계급 아이들은 스스로를 ‘lad’라고 명명한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되면서 ‘lad’라는 용어는 ‘싸나이’로 번역됐다. 역자는 ‘lad’라는 용어가 본래 적극적이고 남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신들을 칭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용어라는 점에서 주체적인 의미를 담아 ‘반항아’로 번역할 수도 있었지만 ‘싸나이’로 번역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아래는 이 책에 나오는 인터뷰 일부이다.


조이 

그들(교사)은 우리를 벌줄 수 있죠. 그들은 우리보다 덩치도 크고, 우리보다 더 거대한 제도 편에 서 있잖아요. 우리는 뭐 보잘것없고, 그들은 거대한 모든 것을 등에 업고 있구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복수하려 들지요. 그쵸, 권위란 게 티껍지 않나요.

에디 

그들은 자기들이 선생이기 때문에 높고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말 별 볼 일 없어요. 보통 사람들에 불과해요. 안 그래요?

빌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만큼 우리를 대접해 주어야만 해요.


노동자 계급 청소년들 가운데에서도 무리를 짓는 ‘싸나이’들에게 학교에 대한 저항은 일상적인 것이다. 각종 사소한 장난으로 교실과 수업의 분위기를 깨고, 일탈 행위들로 인해 교사와 학교로부터 제재받은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다. 동시에 인종 차별과 가부장제에 복무하면서 여성과 비백인을 자신보다 약자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남성성을 과시하며 똘똘 뭉치기도 한다. 그리고 ‘싸나이’들은 일명 ‘범생이’들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자신들은 학교가 강요하는 구시대적인 위계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진짜 삶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무리 지어 저항하고 이를 떳떳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파해 낸 것은 학교가 내세우는 평가 기준의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폴 윌리스가 말한 것처럼, 성적이라는 것은 모든 가치를 평가해 주지 않음에도 성적이 우수하기만 하면 모든 면에서 좋다고 생각되도록 하는 모순적인 평가 기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은 노동자 계급 청소년들이 학교라는 곳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이유와 공명한다. ‘싸나이’들은 화이트칼라 계급을 학교가 강요하는 가치관에 순응하는 과정의 연장선으로 여기고, 이에 대항하고자 자신이 소속될 수 있는 곳으로 노동자 계급 문화를 좇으며, 따라서 노동자 계급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책 결론부에서 폴 윌리스는 교육에 대해 인상적인 단언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은 노동자 계급을 불평등한 미래로 밀어 넣음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에 복종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육의 주요하고도 지속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이 책은 노동자 계급 남성 청소년들의 반학교 문화가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하는 역동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만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폴 윌리스가 이와 함께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학교는 이미 육체 노동을 정신 노동보다 가치 없는 노동으로 의미화함으로써 필히 노동자 계급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는 제도적인 장치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실 학교교육 자체가 노동자 계급 청소년들이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는 체제에 수행하는 저항을 소위 ‘반항’과 ‘일탈’(지금 한국의 맥락에서는 ‘교권 침해’로 칭해질 수도 있겠다) 정도로 치부함으로써, 그들의 계급 재생산을 개인의 문제로 떠넘길 수 있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위 계급, 혹은 화이트칼라 직군을 위해 직조된 교육의 장소인 것이다.


반학교 문화와 대학/입시거부의 공통점


올해, 나는 투명가방끈 활동가로 첫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주간’을 준비하면서 투명가방끈에서 기획해서 펴낸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2015)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을 다시 읽다가 문득 폴 윌리스의 연구가 떠올랐다. 도리어 내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대학거부선언 혹은 대학입시거부선언(대학/입시거부선언)이 가진 저항 행위를 폴 윌리스의 ‘싸나이’들의 저항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단순하게만 놓고 보면 두 집단 모두 학교가 학생에게 강요하는 위계와 복종, 경쟁이 사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싸나이’ 들은 일상적인 반항과 육체 노동자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으로의 결집으로,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선언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여 대학/입시거부선언은 내게 씁쓸한 우화에 그치지 않고, 나를 투명가방끈 활동가로 이끈 동기가 되어 준 것일까. 대학/입시거부자들이 학교와 입시 교육에 저항하면서 가지게 되는 정체성은 폴 윌리스의 책 속 ‘싸나이’들과 많이 다르다. ‘싸나이’ 들이 저항을 하며 귀속되기로 한 정체성으로서 노동자 계급이 이들에게 일종의 자긍심으로 작동한다면,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학거부’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혹은 그들은 어떤 정체성에 귀인해서 자신의 체제 거부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에서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대체로 더 이상 이 체제를 견딜 수 없어서, 혹은 불합리한 교육을 거부할 수밖에 없어서, 대학을 다니고 싶지 않기 때문에, 대학과 대학 입시를 거부했다고들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쓴이들이 자신이 대학을 거부했다는 그 자체에 어떤 자긍심을 느끼지 않고 있기도 하고, 오히려 그 사실이 ‘선언’이 된 것을 겸연쩍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거부에 사람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선언’을 한 이유도 다양하다. 누구는 대학의 학비를 감당할 만큼의 돈이 없어서, 누구는 청소년운동 활동가라는 정체성이 중요해서, 누구는 공부를 못했고 더 공부하고 싶은 동기가 없어서, 누구는 그냥 대학에 갈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거부선언을 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안에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그건 자신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다른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을 청소년운동이라는 둘레 안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활동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청소년운동은 이들에게 미래를 향한 선택지를 늘려 주었고, 또 그 선택을 다른 사람들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줬으며,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대학 거부라는 행위를 선택을 한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서 ‘선언’이라는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가게끔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성기더라도, 개인의 경험을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연대의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집단적인 차원이었을 수도, 개인 간 관계의 차원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처음 투명가방끈과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를 만났을 때 곧바로 폴 윌리스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속 ‘싸나이’들이 문화를 공유하며 정체성 아래 집요하게 결집하고 있다면,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입시 교육이 정당하지 않다는 의제 아래에서 느슨하게 연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는 완전히 다른 도착지처럼 보였다. 두 경로 모두 어떤 의미에서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미래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의 생애 과정이 ‘싸나이’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면, 두 집단 모두 계층 재생산의 측면에서 공통된 경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집단 모두 결국 학교라는 견고한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탈 수 있는 희망과 단절한다. ‘싸나이’들은 차별받는 노동자 계급에 다시 귀속되고(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의 위계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것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대학 중심 사회에서 “학생”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지는 존재들이 되었다.


오히려 더 자조적인 쪽은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다. 학교 체제에 대한 그들의 간파는 어떤 자긍심으로도 포장되지 않고 무의미함, 그러니까 대학이 포장하는 모든 종류의 성과물이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사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았고, 따라서 대학이 구별 짓고자 하는 성취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로부터 존재의 가치도 달라진다는 믿음은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멈춘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선언으로 자신의 삶이 무언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멈춘다. 그들은 선언을 함으로써 삶이 나아지지는 않아도,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직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학/입시거부선언은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결심은 아니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대학 비진학자로서의 삶을 전혀 낙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언을 하기 전에도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더 불안하고, 막막하고, 궁핍하고, 빈곤해질 것을 예감하고 있다. 나아가 선언을 한 이후에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 내가 궁핍해졌다는 사실마저 인정한다. 대학/입시거부 선언은 닥쳐올 이 모든 것을 예감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있는, 입시 경쟁 체제와 대학 중심주의로 학생들을 길들이는 학교에 훈육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렇게 쓰면 꽤나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거창한 선언인 것도 맞다. 원래 선언은 거창한 것이 본질이니까.


선언과 연대의 정치


폴 윌리스가 기술한 ‘싸나이’들과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학교라는 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를 통해 각각의 사회에서 기존의 계층에 가까스로 머물거나 도리어 계층 하락을 겪는 과정을 보면, 둘은 같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집단의 성격과 미래는 명확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 집단이 달라지는 지점은 개인적인 삶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차원이다. 선언이 이 차이를 가능하게 한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 가운데 어떤 이는 사실 ‘대학거부선언으로 도망을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언’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선언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어떤 행위가 되었든 이에 대한 의견을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선언이 됨으로써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어떤 것이 선언이 되는 순간, 그 선언은 개인을 떠나 사회적인 존재가 된다. 


대학을 거부하겠다는 ‘선언’, 입시를 거부하겠다는 ‘선언’, 내게 대학을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겠다는 ‘선언’은, ‘선언’이 됨으로써 비로소 학력주의·학벌주의 사회를 이 선언에 답해야 할 대상으로 호명해 낸다. 나아가 선언은 그 자체로 익명의 대학 비진학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또 다른 연대의 가능성으로까지 나아간다. 즉, 대학/입시거부는 선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대학에 가지 않는 행위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며, 대학 비진학자 집단의 세력화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투명가방끈이라는 단체가 결성된 토대에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해 준다.


대학/입시거부선언은 당사자들 간의 연대를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부선언으로 인한 대학 비진학의 정치화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학력‘주의’와 학벌‘주의’ 반대라는 사회 공통의 의제로 확장하며 당사자 운동을 의제 중심 운동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이는 당사자의 범주마저 확장시킨다. 대학생 혹은 대졸자라는 이유로 한때 자신을 대학 비진학자들과 구분 지었던 이들을 학력·학벌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소환함으로써 이 의제에 공감하는 모든 이를 당사자로 포섭할 수 있는 정치적 모멘텀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거창한, ‘선언’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싸나이’들의 저항심은 시장 안에서 점점 더 남루해져 가는 노동자 계급의 처지와 그 대물림을 문화적인 자긍심으로 재해석하여 노동자 계급으로의 삶을 시장에서의 가치가 아닌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대학/입시거부선언은 시장화된 학교에 담을 수 없는, 시장화될 수 없는 삶을 그저 포장하지 않은 채 남겨 두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래서 두 삶 모두 자본주의의 렌즈로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대학/입시거부선언이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에 실린 다영의 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연대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대학을 다니든, 명문대를 나와 학벌 기득권을 가지고 있든 간에 학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지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가진 조건들이 어떤 권력이 되어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도록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니까. 함께 살아가고 싶다. (……) 당신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가 ‘권력’을 만들어 내서 학벌 사회를 더 공고하게 만들진 않았나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하나 문제가 보이고, 고민되는 점들이 생겨나면 ‘나의 대학거부’는 ‘당신의 대학거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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