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의 수능날, 나는 수능장이 아닌 직장으로 향한다.
특목고에 속하는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들은 수능을 보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성화 고등학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우리는 대학입시에 편향된 교육을 받지 않으며, 99%의 학생들이 취업을 하고 일찍이 현장실습을 나간다.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이러한 인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학입시를 하지 않는 고등학생이라니? 대학에 가지 않고 취업을 한다니? 수능을 보지 않는 고3이라니?
때로는 ‘어린 나이에 대견하다’는 시선, ‘고졸로 쉽지 않겠다'는 말투, ‘왜 굳이 힘든 길로 가냐'는 질색을 느꼈다. 왜 유독 이런 선택에만 그런 평가가 뒤따르는지 줄곧 의아했다. 다른 학생들이 입시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듯이, 나도 취업을 하고 회사에 가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치열한 입시경쟁이 더욱 고단한 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견고했다.
대학 비진학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입시를 포기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해야 했다거나, 힘겹거나 안타깝게 보인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설령 그 편견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대학 비진학이 대학 진학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등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청소년'이라는 이름에 갇혀 활동가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시선들을 마주친다. 무릇 청소년이라면 대학입시를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줄 알고, 인권운동은 입시를 위해 생기부를 채우려는 ’발악‘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청소년인권운동은 대학입시를 위해 점수를 따려는 행위'라는 터무니 없는 착각은 곱씹어볼 수록 재밌다. 저 문장이 성립하려면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는 무조건 청소년이어야 하며, 그 청소년은 당연히 학생일 것이고,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대학입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단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담겨 있는 걸까.
언젠가 용의복장규제 관련해서 인터뷰를 했을 때, 기사에 ‘얌전히 학원 가서 공부나 해라'라는 댓글이 달렸었다. 당시에는 그 댓글을 읽고 몹시 불쾌하며 화가 났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지금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학생과 공부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구나. 대학입시 없는 삶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하다.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청소년의 삶을 대학입시에 가둬놓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삶이 대학입시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 오늘날 입시경쟁은 능력주의의 뿌리가 되어 사회를 갉아 먹고 있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공교육은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3년만 죽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하는 사회다. 그런 당연한 경쟁은 교문 밖으로 전파되어 우리와 맞닿게 한다.
이맘때 곳곳에 걸린 수험생 응원 현수막을 보고 있자면, 저 응원이 나에게 닿을 일은 없겠구나 하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단지 응원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정부가 잼버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고교취업장려금 예산을 끌어다 쓴 일도, 직업계고 자격증 취득비용 지원 예산이 2년 연속 전액 삭감된 일도 우리가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응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정부는 계속해서 우리의 유일한 지원을 끊어내려 하고 있다. 수험생들과 직업계고 학생들을 동일선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는 쓸쓸함이 수능날이 다가올 수록 커진다.
19살의 수능날, 나는 수험생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수험생들에게 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므로, 나는 온전히 개인적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
‘지난 3년이 너무 아깝다’며 허무해 하는 친구에게, 감히 3년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입시에 모든 걸 걸었던 지난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삶을 유예할 수 없듯이 어떠한 말도 보상이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이런 시험 하나가 너에게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걸 걸었던 입시는 하나의 시험으로 끝나버리지만, 우리 삶은 이제부터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은 채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19살의 수능날, 나는 수능장이 아닌 직장으로 향한다.
특목고에 속하는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들은 수능을 보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성화 고등학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우리는 대학입시에 편향된 교육을 받지 않으며, 99%의 학생들이 취업을 하고 일찍이 현장실습을 나간다.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이러한 인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학입시를 하지 않는 고등학생이라니? 대학에 가지 않고 취업을 한다니? 수능을 보지 않는 고3이라니?
때로는 ‘어린 나이에 대견하다’는 시선, ‘고졸로 쉽지 않겠다'는 말투, ‘왜 굳이 힘든 길로 가냐'는 질색을 느꼈다. 왜 유독 이런 선택에만 그런 평가가 뒤따르는지 줄곧 의아했다. 다른 학생들이 입시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듯이, 나도 취업을 하고 회사에 가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치열한 입시경쟁이 더욱 고단한 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견고했다.
대학 비진학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입시를 포기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해야 했다거나, 힘겹거나 안타깝게 보인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설령 그 편견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대학 비진학이 대학 진학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등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청소년'이라는 이름에 갇혀 활동가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시선들을 마주친다. 무릇 청소년이라면 대학입시를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줄 알고, 인권운동은 입시를 위해 생기부를 채우려는 ’발악‘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청소년인권운동은 대학입시를 위해 점수를 따려는 행위'라는 터무니 없는 착각은 곱씹어볼 수록 재밌다. 저 문장이 성립하려면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는 무조건 청소년이어야 하며, 그 청소년은 당연히 학생일 것이고,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대학입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단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담겨 있는 걸까.
언젠가 용의복장규제 관련해서 인터뷰를 했을 때, 기사에 ‘얌전히 학원 가서 공부나 해라'라는 댓글이 달렸었다. 당시에는 그 댓글을 읽고 몹시 불쾌하며 화가 났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지금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학생과 공부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구나. 대학입시 없는 삶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하다.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청소년의 삶을 대학입시에 가둬놓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삶이 대학입시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 오늘날 입시경쟁은 능력주의의 뿌리가 되어 사회를 갉아 먹고 있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공교육은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3년만 죽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하는 사회다. 그런 당연한 경쟁은 교문 밖으로 전파되어 우리와 맞닿게 한다.
이맘때 곳곳에 걸린 수험생 응원 현수막을 보고 있자면, 저 응원이 나에게 닿을 일은 없겠구나 하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단지 응원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정부가 잼버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고교취업장려금 예산을 끌어다 쓴 일도, 직업계고 자격증 취득비용 지원 예산이 2년 연속 전액 삭감된 일도 우리가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응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정부는 계속해서 우리의 유일한 지원을 끊어내려 하고 있다. 수험생들과 직업계고 학생들을 동일선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는 쓸쓸함이 수능날이 다가올 수록 커진다.
19살의 수능날, 나는 수험생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수험생들에게 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므로, 나는 온전히 개인적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
‘지난 3년이 너무 아깝다’며 허무해 하는 친구에게, 감히 3년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입시에 모든 걸 걸었던 지난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삶을 유예할 수 없듯이 어떠한 말도 보상이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이런 시험 하나가 너에게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걸 걸었던 입시는 하나의 시험으로 끝나버리지만, 우리 삶은 이제부터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은 채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