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2023 대학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운 나쁜 애들 중에 제일 운 좋은 애 (치리)

202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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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나쁜 애들 중에 제일 운 좋은 애


치리


 저는 대학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대학 입시가 개같이 망했습니다. 수능에서 두 과목을 밀려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죠? 저도 어떻게 그랬을 수 있나 싶습니다…….

  두 과목을 밀려 쓰고도 대학에 갔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첫째로는 재수를 할 돈이 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그렇게 밀려쓰고도 그럭저럭 장학금을 받고 지방 국립대에 갈 정도는 되었기 때문입니다. 별 재수없는 놈이 다 있네 싶겠지만, 저는 이후 엄청난 우울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제가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시 제도 아래에서 저는 언제나 ‘좋은 학생’ 이었고, 시험은 저에게 가장 쉬운 과제였습니다. 그렇게 지방대 법대에 들어가고, 늘 그랬듯이 교수님들의 귀염둥이(??)가 되었을 무렵, 코로나 사태가 터졌습니다.

  자연재해는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망한 입시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던 부친의 파산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와 함께 제가 따로 계획하던 유학도 완전히 망했습니다. 어떻게든 나갈 수야 있었겠지만, 코로나 시대의 유럽을 아시아 여성으로서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도박보다도 위험한 행위일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우울한 코로나 시대를 지내고 저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고군분투의 반복입니다. 저는 엄마가 먼저 이주한 미국으로 거의 준비도 못 하고 내던져졌습니다. 간결하게 서술된 위 두 문단도 쿠팡과 콜센터 같은 노동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시간들을 그저 축약했을 뿐입니다. 한번의 시험을 답안지를 밀려썼다는 이유로, 그 이후로 이렇게까지 인생이 꼬이고 망하게 되는 것이 좋은 제도이고 좋은 사회일까요. 

  그러나 저는 그 와중에도 해낸 것들과 지켜낸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고, 공부를 할 것이라는 저와의 약속을 지켜냈고, 학부생으로는 이례적인 연구과제도 몇 개 참여한 적이 있으며, 공저자긴 하지만 책도 출간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는 '운 나쁜 애들' 중에서 '제일 운 좋은 애'입니다. 아주 간당간당하게, 딱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정도로만 망하는.

  저는 입시를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았든, 망하든 망하지 않았든, 그런 선택과 결과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제 선택과 결과는 모두 망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했다’는 결과는 결코 그곳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때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곳에 데려다주기도 하지요. 그런 의외성이 저를 지금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선택과 결과 그 뒤를 상상할 수 있기를 같이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