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2023 대학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1등과 2등에서 벗어나기 (이름)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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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과 2등에서 벗어나기

이름 (전북청소년인권모임 마그마)


나는 사회가 세운 ‘정상’의 기준에 어느 정도는 걸친 채로 태어났다. 하고 싶은 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부모와 재력, 정서적 지지, 화목한 가족, 나쁘지 않은 인간관계… 그리고 나는 배우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어쩌면 엘리트 학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공부’와는 맞지 않았다. 하기 싫었다기보다는, 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도통 할 힘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중학교 때 어떤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이 좋았다. 주변에선 날 보고 똑똑하다고 했지만, 성적을 내는 데에 특화된 게 똑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같은 반에는 전교 1등인 학생이 있었다(편의상 A라고 부르겠다). 듣기로는 전 과목 학원에 다닌다고 했고, 그냥 평소에 봐도 엄청 성실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러했다.

이제는 중간고사인지 기말고사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 시험을 치르고 난 후, 담임 조회 시간이었다. 갑자기 담임이 이번 시험 1등은 내가, 2등은 A가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담임이 반 학생들 앞에서 나와 A의 사적인 정보를 동의 없이 까발린 건데, 성적이 나쁜 건 수치라 숨겨야 하지만 좋은 건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담임이 나가고, 내 친구들은 나에게 와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나는 A를 바라봤다. A를 오래 알아 온 나는 그가 속으로 많이 상심했을 걸 알아서 위로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위로하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어쩌면 A마저 나의 위로가 조롱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A를 밀어내고 1등을 차지한 ‘승자’니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승리가 다른 사람의 실패와 절망을 통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겠는가? 그 후 한동안 내 기분과는 별개로 축하의 말들을 계속 받았다.

며칠간 계속 고민한 끝에, 나는 내가 느낀 찝찝함의 이유를 알아냈다. 기괴했다. 내가 성적을 올리려면 다른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하고, 때로는 ‘노력이 최고’라면서 때로는 ‘그래도 재능은 못 이긴다’며 찬양하기도 하고, 교사가 학생의, 학생이 학생의, 사람이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사회가 정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끼워 맞추고 또 그렇지 못하면 낙오되고, 생존과 계급을 얻어내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걸 갈아 넣어야 하는 학교의 모든 광경이, 그 모든 싸움에서 사회적 힘을 동원해서 많은 실패를 짓밟고 올라선 이들을 보고 ‘성공’했다고 하는 사회가 기괴했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는 도무지, 정말 도무지 성공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다들 성적이 너무 잘 나와서 변별력이 없었다며 사과하는 교사도 보고, 다른 애들도 시험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도 보고, 잠도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망해서 우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그 광경 속에서 나는 결국 제 발로 학교를 뛰쳐나왔다. 대학 못 가겠다고 말했다. 지고 이기는 것 중 어느 쪽도 싫었다. 학교 안에서는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게 싫었고, 그냥 다 버려내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원한다고 모든 걸 버릴 순 없고, 여전히 많은 고민이 남아 있다. 나처럼 대학을 가고 안 가고를 고를 수 있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임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지금의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작더라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의 실패한 이야기, 배제된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하고 싶다. 환상적인 성공담과 아름다운 말을 앞세워 고통과 불평등을 숨기는 지금의 입시에 끈질기고 지독할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저항하고 싶다.